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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 쓰시겠다 하라
제목 | 주님이 쓰시겠다 하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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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마 21:1-11 | ||
설교자 | 김재수 | 날짜 | 2018-03-11 |
역사가 우리에게 남겨준 냉정한 교훈이 하나 있습니다. 예수님 외에 이 땅에 왔다간 그 어떤 지도자도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하고 사람들의 기대를 충족시켜준 영웅은 없었습니다. 인류 역사속에서 지도자에 대한 기대의 역사는 곧 실망의 역사였습니다. 지나친 기대는 금물입니다. 한 사람 지도자에게 걸었던 지나친 기대나 꿈은 언제나 실망으로 돌아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모두가 이 시대의 지도자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할 일을 찾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입니다. 각자 자기 할 일을 아는 교회가 건강한 교회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천년전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소중히 쓰임 받았던 인물들을 통해 하나님은 나를 어떻게 쓰기를 원하시는가? 하나님에게 쓰임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복된 것인가?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쓰시는가? 성경의 비밀을 찾아보고자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계획의 성취가 바로 나에요. 쓰임 받는다는 것은 참 좋은 일입니다. 그것이 귀한 사람에 의해 쓰임 받을 때는 더 행복합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길에 쓰임 받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여기서 가장 소중하게 쓰임 받은 존재는 사람이 아닌 한 마리 어린 나귀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감람산 벳바게 마을까지 왔을 때에 제자 둘을 맞은편 마을로 보냈습니다. 이 마을이 마가복음과 누가복음 본문에는 베다니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벳바게와 베다니는 감람산 기슭에 서로 마주보고 있는 이웃동리였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베다니 마을에 들어가면 큰 나귀와 작은 나귀 한 마리가 묶여 있을 텐데 풀어 끌고 오라고 했습니다.
또 마가복음과 누가복음 본문에서는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작은 나귀, 나귀 새끼를 풀어 끌고 온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제자들을 보내며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나귀를 풀어 끌고 가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이 본문을 대할 때 우리는 몇 가지 의구심을 갖게 됩니다.
첫째, 예수님께서 거기 나귀가 매인 것을 어떻게 아셨을까? 하는 것입니다.
둘째, 당시 나귀 한 마리는 우리네 농촌 황소 한 마리처럼 농사 살림 밑천이었을텐데 어떻게 그렇게 쉽게 선뜻 내어 줄 수 있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문점들과 함께 우리의 눈을 주목시키는 한 구절이 있습니다.
마태는 다른 복음서들에 없는 한 구절 주석을 더하고 있습니다. 여기 한 마리 나귀 새끼가 쓰임받게 된 이 사실이 이미 구약에 예언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사복음에 다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만큼 오늘 본문은 제자들에게 충격적이고 인상적이었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나 구약의 선지자 스가랴가 490년전 이미 예언했다는 이 내용은 마가나 누가에는 없는 공관복음서 중 마태복음에만 있습니다. 마태는 예수님을 왕으로 이해했기 때문에 지금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왕의 왕국 입성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구약에 예언된 왕이라는 거에요.
지금 나귀 한 마리가 만왕의 왕되신 예수를 모시는데 쓰임 받았다는 것이 마태의 통찰입니다.
그것도 그 나귀 새끼가 이날 이렇게 영광스럽게 쓰임 받을 것이 이미 오래전에 하나님에 의해 계획이 되고 예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4절을 보십시오.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사랑하는 성도, 하나님께서 나귀 새끼 한 마리를 향하여 이렇게 섬세한 계획을 가지고 계셨다면 저와 여러분의 인생을 향한 어떤 계획을 어떻게 세워 놓으셨을까요? 여러분, 가슴이 설레이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생을 지으셨습니다. 당신을 이 땅에 보내시기로 만세전에 작정하셨습니다.
죄와 사망에 빠진 우리를 살리시려고 독생자 하나님을 보내셨습니다. 그분을 버리고 우리를 사셨습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님하고 맞바꾼 예수짜리 인생들입니다.
이러한 저와 여러분을 향한 계획을 가지고 계시지 아니할까요? 아무렇게나 살다가 죽도록 내버려 두실까요?
시시하게 아무런 의미 없이 살도록 우리를 만드셨을까요? 아닙니다. 나귀가 수레를 끄는데 쓰임 받을 수 있고, 짐을 지고 나르는데도 쓰임 받을 수 있어요.
그러나 본문은 예수를 위해 쓰임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귀하고 영광스런 것인가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을 위해, 예수를 위해, 하나님 나라를 위해, 영광스럽고 황홀한 사역자로 쓰임 받을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딤후 2:20절 이하에 보면 심지어 이 땅에 몇 번 쓰임 받다 깨어지는 그릇 하나까지도 쓰임이 있고 쓰임의 목적이 있다고 사도 바울의 입을 통하여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큰 집에는 금그릇도 있고 은그릇도 있고 나무와 질그릇도 있습니다. 여기 큰집은 하나님의 집이요 그릇은 우리 인생을 비유합니다.
귀한 그릇은 무엇으로 만들었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쓰임 받기에 합당하냐? 하는 것입니다. 얼마를 가졌느냐?
어떤 위치에 있느냐? 얼마나 아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과연 하나님 앞에 쓰임 받는 그릇이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이 쓰실 때만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이 쓰실 때만 행복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이 쓰실 때만 형통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향한 분명한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향한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이제 본문을 통하여 제기되었던 의구심들을 해결해 보겠습니다.
주님은 마을에 들어가 보지도 않고 어떻게 거기 나귀가 매여 있다는 것을 아셨습니까? 또 왜 남의 나귀를 풀어 끌고 가느냐? 주인이 화를 낼 때 주님이 쓰신다고만 하면 나귀를 내어줄 것이란 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뿐만 아닙니다. 어떻게 주가 쓰신다, 말 한마디로 삽 한 자루가 아니라 나귀를 순순히 내어 줄 수 있었습니까?
대부분 주경가들은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시니 그런 것 쯤 쉽게 아셨을 것이라고. 또 헌신되고 준비된 무명의 제자가 있었음을 알고 계셨다고 쉽게 생각해 버립니다. 그러나 주님이 이런 것까지 당신의 신성을 사용하셨을까요? 분명 그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을 신학적인 관점으로 보면 그렇게 밖에 안보입니다. 그러나 교회의 관점, 공동체 성이라는 관점에서 본문을 보면 전체 그림이 아주 쉽게 보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여러 차례 방문하셨지만 한번도 예루살렘에서 주무신 적이 없습니다. 그때마다 베다니에 오셔서 주무셨습니다. 마을 사람들과 함께 식사도 하고 말씀도 나누었습니다. 베다니는 마르다와 마리아가 사는 마을입니다. 늘 예수님을 위해 식사를 준비하던 마르다가 있고 발 밑에 앉아 말씀을 즐겨 듣던 마리아가 있는 곳입니다.
여기서 나사로가 죽었을 때 예수님은 사랑하는 자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눈물을 흘리시며 그를 살려주시기도 했습니다. 베다니는 슬픔의 집, 가난한 사람의 집이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아픔과 슬픔, 질병과 고통을 삼키며 살아가던 베다니 사람들의 친구였고 희망이었습니다.
주님은 이 마을 나병 환자를 고치셨습니다. 죄 많은 여인의 아픔을 어루만지셨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어 소망과 생명의 주님이 되심을 보여주셨습니다.
나중에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부활하셨을 때 베다니 마을 앞까지 나가셔서 저희들을 축복하신 후 하늘로 올라 가셨다고 누가복음 24장 50절-53절은 기록합니다. 그때 그곳에 모인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들어가 기도하고 찬송하다가 성령의 충만을 체험했습니다. 결국 그들이 세상을 변화시켰습니다.
그래서 그 마을 사람들은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아낌없이 바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마가복음 14장 3절 이하에 보면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 한 여인은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머리에 부어 예수님의 장례를 미리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예수님이 지금 십자가를 향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데, 우리를 구원하신 왕으로 입성하시는데, 그까짓 나귀 한 마리 바치지 못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 안에 베다니 사람이 있었고 베다니 사람 안에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이런 관계성 속에서 주여, 여기 있습니다. 마음대로 쓰십시오. 진정한 그리스도의 주권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 무명의 헌신자 나귀 주인이 나귀를 내어 준 것은 단순히 나귀라는 짐승을 내어 준 것이 아닙니다.
바로 자기 자신을 준 것입니다.
또 예수님은 그 마을 사람들의 한 가족이 되었기에 어디에 누구의 나귀가 매여 있고 어디에 어떤 나귀가 있는지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주께서 쓰시겠다 말하면 억지로 내어놓는 것이 아니라 기쁨으로 내어놓을 것도 아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천국가족입니다. 이것이 헌신입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그렇습니다.
주가 쓰시겠다 말씀하실 때 베다니 사람들은 주님이 필요하다면 당연히 드려야지요. 생각했습니다.
본문 3절 보십시요.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아브라함은 이삭을 바치라 할때 즉시 순종했습니다. 제자들은 즉시 모든 것을 버려두고 주를 따랐습니다.
베다니 사람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 가실때는 언제나 자신들을 방문하고 만나 주셨습니다.
그러나 오늘 따라 마을을 찾아오시지 않고 나귀만 요구하십니다. 그들은 이 길이, 이번 여행이 어떤 길인지 알았을 것입니다. 마지막 여행이요 십자가를 지시러 가는 길임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나귀를 드리는 것은 예수의 죽음을 준비해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여기에 헌신의 원리가 있습니다. 우리가 주를 위해 무엇을 할 때마다, 우리가 주를 위해 뭔가를 드릴 때마다 우리의 가슴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가 묻어 있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에 대한 감사와 감격으로 넘쳐흘러야 합니다.
본문에 매여 있다는 말은 완료 분사로 마치 나귀가 자기를 풀어 가도록 기다리며 매여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 시간 사업과 물질에 묶여 있는 분이 계십니까? 묶인 것들이 풀어지기를 빕니다. 주를 위해 바로 쓰임 받길 축복합니다. 질병에 묶여 있는 가정이 있습니까? 묶인 질병은 풀어질 찌어다. 주신 건강 주를 위해 올바로 쓰임 받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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