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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눈물
제목 | 예수님의 눈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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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히 5:5-10 | ||
설교자 | 김재수 | 날짜 | 2018-07-22 |
성경에 보면, 모든 믿음의 사람들은 눈물의 사람이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야곱과 요셉도, 모세와 다윗과 엘리야도, 베드로와 요한과 바울도, 대부분의 성경의 인물들이 눈물을 흘리는 울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성경은 바로 우리 예수님이 통곡의 사람, 눈물의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우리 주님의 눈물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복음서의 기록에 의하면, 예수님께서는 적어도 3 가지 경우에서 우셨다고 합니다.
첫 번째, 우리가 볼 수 있는 예수님의 눈물은, 바로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에 계실 때에 친구 나사로가 병이 들었다는 소식을 전해 받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살고 있는 베다니에 도착하셨을 때에는, 이미 나사로가 죽은 지가 나흘이나 지난 다음이었습니다.
나사로의 누이 마르다와 마리아가 각각 따로 주님께 나아와서 좌절된 마음으로 통곡을 합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예수님께서 물으십니다. 그를 어디 두었느냐? 와서 보옵소서, 무덤으로 안내를 합니다.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우리 주님의 그 거룩한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입니다.
이 예수님의 눈물, 어떠한 눈물입니까? 적어도 예수님의 이 눈물은 자기 자신의 슬픔 때문에 흘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또 그 슬픔을 억제하지 못해서 우는 눈물도 아니었습니다! 요한복음은 분명하게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나사로가 병들었다고 하는 그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에, 예수님께서는 이틀이나 더 그곳에 그대로 머물러 계시면서 지체하셨다고 말합니다.
왜 이틀이나 더 지체하시는 것입니까? 우리가 성경 전후를 아무리 살펴보아도,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도 곧바로 달려가지 못하였던 다른 이유들을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무슨 집회를 하고 계셨던 것도 아니고, 누구하고 중요한 약속을 하고 있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성경에는 그런 내용들이나, 다른 어떤 사건들이나, 이유가 될 만한 것들이 아무 것도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바로 이 사실을 놓고 우리가 요한복음 11장 전체를 살펴보면, 예수님께서 곧바로 움직이지 아니하시고 이틀이나 더 지체하고 계셨던 이유는 오직 이것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나사로가 죽기를 기다리신 것입니다.
그리고 죽은 지가 나흘이나 지나서 무덤 속에 묻혀있던 자를,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행여나 하는 요행마저도 포기해 버리게 하시고, 그를 다시 살리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들은 처음부터 예수님께서는 이 병의 최종 결과가 죽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 될 것이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보세요. 바로 이점이 또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아주 중요한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이 조금 후에는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실 이적을 행하려고 하고 계시면서도, 또 지금 죽어있는 나사로가 조금 후에는 다시 살아나서 무덤에서 걸어 나오게 될 것을 알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님께서는 진정한 슬픔으로 가득 차 있었고, 주님의 눈에는 눈물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의 음성으로 나사로야 나오너라, 이렇게 죽음에서 나사로를 불러내셨고, 나사로가 살아나서 무덤 밖으로 나오는 그때까지도, 예수님의 얼굴은 이 눈물로 얼룩져 있었습니다.
이 예수님의 눈물! 어떠한 눈물입니까? 그것은 바로 사랑의 눈물이었습니다.
우리 크리스찬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바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며, 그가 가신 길을 가며, 그가 하신대로 따라서 사는, 예수님처럼 사는 사람들이 바로 크리스찬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이 흘리신 이 눈물을 우리 크리스찬도 흘리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애통하는 자들과 함께 애통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고.
우는 자에게 있어서 같이 울어주는 것보다도 더 큰 사랑과 위로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스데반이 돌에 맞아 순교할 때, 사도행전은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와 마르다와 함께 우셨던 것처럼, 우리가 슬픔을 당할 때에 우리와 함께 우십니다.
여러분, 여러분에게 무슨 슬픔이 있습니까? 눈물이 있습니까? 가슴 아픈 일이 있습니까?
조용히 여러분과 함께 울어주시는 주님을 바라보세요. 위로를 받으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크리스찬이기에, 예수님과 같은 이런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사랑을 나누는 눈물, 우는 자들과 함께 우는 눈물을 우리 흘려야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예수님께서 우신 것은, 감람산에서 예루살렘 성을 내려다보시면서였습니다.
누가복음 19장에 이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종려주일이라고 부르는 이때에 예수님께서는 나귀를 타시고, 호산나를 외치는 많은 무리들의 환호소리를 들으시며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셨는데,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예루살렘 성을 내려다보시며 울기 시작하셨습니다.
비록 지금은 군중들이 호산나 하고 외치지만, 이제 며칠이 못가서 바로 그들이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외칠 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들을 보시며 우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용된 동사는 크게 우는 것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을 보시면서 소리 내어 우신 것입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내가 암탉이 병아리를 품듯 너를 품으려 한 것이 몇 번이더냐?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예루살렘은 평화의 성이라고 하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 역사를 보면, 거기에는 결코 평화가 없었습니다.
예루살렘은 여러 번 함락되고, 부서지고, 재건 할려고 하면 또 다시 함락되고 파괴되었었습니다.
평화의 성이란 이름을 가졌지만 평화가 없었고, 여러번 정복되고 함락당하는 것은 무척이나 슬픈 사실입니다.
그러나 더 슬픈 사실은, 바로 이 속에 살고 있는 주민들이, 그 백성들이, 하나님을 잊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생명의 말씀을 전해주러 오셨지만, 그들은 오히려 예수님을 조롱했고, 죽이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습니다. 진정한 평화를 위한 기회가 이제 주어졌지만, 사람들은 평화의 왕을 알지를 못했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그들의 눈이 먼 것뿐만 아니라, 이제 그들에게 닥칠 그들의 운명으로 인하여 한탄하시며 우십니다. 사실 예수님의 이 예언과 같이, 주후 70년에 예루살렘 성은 로마의 군대에 의하여 포위되었고, 비참히 살육되고 초토화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평화의 왕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운명을 스스로 자초하는 것을 바라보면서 어찌 통곡을 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이제 예수님은 오늘날도, 선지자들의 음성과 사도들의 복음을 잊어버린 마을과 도시들을 보시고 우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안동, 남선, 신석을 보시고 울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그 안에서 살고 있는 모든 영혼들을 보십니다. 나를 보십니다. 여러분을 보십니다.
그리고 최후의 날에 존경을 받을 자와 멸망 받을 자, 모든 사람을 우리 주님은 아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시는 것입니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우시는 겁니다. 그 속에 있는 우리를 보시며 울면서 말씀하십니다. 너, 그러면 죽는다. 패망이다. 절망뿐이다. 이리로 오너라. 내게로 오너라.
우리는 예수님의 이 눈물을 닮아야만 합니다. 우리는 얼마만큼 안타까운 마음으로 주님께서 우신 이런 울음을 울어보았습니까? 여러분은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들에게, 그들이 지금 이 순간도 임박해 있는 영원한 심판을 향해 치닫고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해준 적이 있으십니까?
그들이 멸망당할 것으로 애통해 하신 적이 있으십니까?
내 형제 중에, 내 친척 중에, 내 친구 중에, 내 아내가, 내 남편이, 내 아이들이, 이대로 그냥가면 영원히 끝나버리고 맙니다. 그런데 얼마만큼 주님이 흘리신 이 눈물을, 나는 그들을 위하여 흘리고 있습니까? 크리스찬이라면 이 같은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바울은 그의 형제, 골육, 친척을 위해서는 그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라고, 그치지 않는 고통과 눈물로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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